수능 망함 - 십수 년 전 좌절했던 이야기

2015년 11월 12일. 수능날이었다. 내 일이 아니다보니, 그리고 내 주변 지인들의 일이 아니다보니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 이슈였다. 

퇴근길에 신호에 걸려서 대기하던 중에 갑자기, 불현듯, 문득. 내가 망친 십수 년 전의 수능이 떠올랐다. 아직도 생생한 그 기억들. 나는 고등학교 때 공부를 곧잘 했었다. 사립 고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의 '귀여움'도 꽤나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내가, 살면서 치룬 시험들 중에서, 자질구레한 쪽지시험 따위를 포함하여, 가장 망친 시험이 수능이다. 수능 망함... 나는 수능날 알았다. 내가 새 중에서도 가장 작은 새의 가슴을 가진, 소심이라는 말에 초, 라는 말을 수십개는 붙여야 하는 초초초초초초초....소심쟁이, 인것을.

수능 전 날 잠을 못잤다. 두 시간 잤다. 왠지 망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1교시 언어영역, 나의 계획으로는 120점 만점에 114에서 116점은 받았어야 했다. (다시 잘난척 하자면 나는 수능 전 날까지는 꽤 공부를 잘했다...)

아, 듣기평가 1번이 안 들린다. 큰일이다. 여기서 하나를 벌써 틀리면 남은 59문제는 어떡하나...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2번이 나온다. 망했구나 망했어, 라는 말이 내 머리에서 내가 말하고 내가 듣는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험에서 나는 시작한지 오 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야구로 치면 선발투수로 올라가서 1회초에 아웃카운트 하나 못잡고 10점 정도 준 격이고, 축구로 치자면 시작 10분만에 한 세네 골 정도 내어준 꼴이랄까.

듣기평가를 망친 것을 만회하고자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문제를 풀었고(이건 내 무의식이 작용했다. 나는 이미 정신이 나가 있었기에.) 결과는 더 엉망이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오 분 남기고 무려 세 지문 분량의 문제 더미(15문제)를 풀지 못했다. 세상의 종말이 눈 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찍었다. 문제 읽고 답 적고, 문제 읽고 답 적고.

그렇게 수학도 망치고, 사탐, 과탐 망치고, 영어 망치고...도미노가 쓰러지는 걸 천천히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언어를 치고 책가방을 매고 일어서려다 참았고, 점심을 입 속에 우겨넣으면서도 교문을 떠날 생각까지 밀어 넣은 것은 딱 하나의 생각 때문에서였다. 나는 초.........소심쟁이다. 내년에 재수를 한들 나는 이 중압감은 견딜 수 없다. 그냥 망친 채로 끝내자.

(수능 대박은 개뿔... 수능 망함...)

집에 오는 길에 그 참담한 심경을 잊을 수가 없다. 삼삼오오 떠드는 소리들. 불 밝힌 식당가 거리의 왁자지껄함. 친구들의 계속되는 전화에 핸드폰을 길에 던져버릴 뻔 했다.(그 날 나와 내 친구들은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더랬다.)

그 날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집에 도착해서 내 방문을 걸어잠근 이후 기억은 나지 않는다. 기사회생 격으로 나는 언어영역에서 찍은 15문제중 11문제를 맞추는 신기(?)를 발휘하였고(이는 내가 꼼꼼히 푼 문제들의 정답률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완전한 나락은 겨우 면하였다. 

결론적으로 그 해 수능은 그 전 해에 비해 갑자기 어려워져서 400점 만점에 350, 360점이면 서울대 간다던 수능이었다.(확실치는 않다. 나는 한동안 귀닫고 땅만 보고 지냈으니깐.) 

암튼 그러니깐(횡설수설...) 나는 언어영역 듣기평가 3문제를 틀렸어도(실제 6문제 중 1,2,3번을 틀림) 평정심을 유지했다면 어쩌면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현실에서 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한 소심쟁이가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시험을 망친 이야기를 끄적여 보았다.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다. 큰 시험 트라우마가 남아 있긴 하지만, 이제 내 인생에 수능만큼 큰 시험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깐.